전통 발효식품의 미생물 다양성, 과학으로 밝히다
한국 전통 발효식품은 단순히 ‘맛있는 저장 음식’이 아니라 수많은 미생물이 공존하며 만들어내는 복합 생태계입니다.
전통 발효식품 속 숨겨진 생물 군집의 세계
김치, 된장, 간장, 청국장, 막걸리 등 각 발효식품은 사용되는 원재료, 소금 농도, 온도, 발효 기간, 지역의 미생물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미생물 군집
구조를 가집니다. 김치의 경우 발효 초기에는 류코노스톡(Leuconostoc) 속 유산균이 주도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락토바실러스(Lactobacillus)
속이 우세해집니다. 이러한 변화는 산도(pH)의 하강, 염도 변화, 영양소 소비 속도와 같은 환경 요인에 의해 결정됩니다.
된장과 간장에서는 아스퍼질러스 오리제(Aspergillus oryzae)와 같은 곰팡이가 주효소를 공급하는 ‘1차 발효’가 진행된 뒤, 저장 과정에서
바실러스(Bacillus) 속과 다양한 유산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최종 풍미를 완성합니다. 특히 청국장은 바실러스 서브틸리스(Bacillus subtilis)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는 발효환경으로, 다른 발효식품에 비해 유산균 비율은 낮지만 단백질 분해 능력이 월등합니다. 이러한 미생물의 다양성은 단순히 종류의 나열이 아니라, 발효 과정 동안의 상호작용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품질과 기능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NGS, Next Generation Sequencing) 기술을 이용해 발효식품 속 미생물의 메타게놈 분석을 수행합니다.
이 방법을 통해 전통 발효식품에 존재하는 수백 종의 미생물과 그 비율 변화를 시간대별로 파악할 수 있으며, 과거에는 알 수 없었던 ‘소수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생물’까지 규명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장인들의 경험에 의존하던 발효 노하우를 과학적으로 재해석하고, 표준화된 발효 공정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생물 다양성과 기능성 성분의 상관관계
발효식품 속 미생물 다양성은 단순히 군집의 ‘풍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 기능성과 직결됩니다. 예를 들어 김치 속 다양한 유산균 종들은 발효 단계에 따라 비타민 B군, 비타민 K, 항산화 물질(폴리페놀, 카로티노이드) 등을 합성하는데, 이러한 생리활성 물질의 양과 종류는 미생물 조합에 따라
달라집니다. 즉, 동일한 배추와 양념으로 김치를 담가도 발효 환경과 미생물 군집의 차이에 따라 기능성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된장에서는 곰팡이와 세균이 함께 만들어내는 발효 산물이 특징적입니다. 아스퍼질러스 오리제는 단백질을 분해해 아미노산을 공급하고, 동시에
항산화 물질과 항암 효과가 보고된 이소플라본 아글리콘을 생성합니다. 여기에 바실러스 속은 고분자 펩타이드를 분해하여 혈압 조절과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펩타이드 조각을 만들어냅니다.
청국장은 나토키나제를 비롯한 단백질 분해 효소와 함께, 대사산물로 폴리아민(세포 성장 조절 물질)과 비타민 K2를 공급하여 심혈관 건강과 골다공증 예방에 기여합니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최근 메타트랜스크립토믹스(Metatranscriptomics)와 메타볼로믹스(Metabolomics) 연구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메타트랜스크립토믹스는 발효 과정에서 어떤 유전자가 활성화되는지를 파악해 ‘어떤 미생물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메타볼로믹스는 실제 생성된 대사산물을 분석해 건강 기능성의 실질적인 근거를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발효식품의 ‘건강 레시피’를
맞춤형으로 설계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전통 발효식품 미생물 다양성 연구의 미래
한국 전통 발효식품의 미생물 다양성 연구는 현재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역별 토착 미생물에 주목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예를 들어 전라도와 경상도의 된장은 동일한 재료를 사용해도 기후·습도·대기 미생물의 차이로 인해 군집 구성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차이는
발효식품의 독특한 향미와 기능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므로, 각 지역의 토착균을 ‘발효 종균’으로 등록해 산업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 발효식품 연구는 맞춤형 발효식품 개발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개인의 장내 미생물 분석 데이터를 기반으로, 특정 건강 문제(예: 고혈압, 고지혈증, 변비, 면역 저하)에 맞는 발효 미생물 조합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변비가 있는 사람에게는 장 운동을 촉진하는 락토바실러스 루테리(Lactobacillus reuteri)와 비피도박테리움 속을 강화한 김치를, 고혈압 환자에게는 ACE 억제 펩타이드를 다량 생성하는 바실러스 강화 된장을 제공하는 식입니다.
미래에는 이러한 미생물 다양성 연구가 발효식품의 표준화와 글로벌화를 이끌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일본의 미소, 프랑스의 치즈처럼 특정 미생물 종을 중심으로 한 발효식품이 세계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국의 김치, 된장, 청국장도 미생물 다양성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품질과 기능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면
세계인의 건강식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전통 발효식품 속 미생물은 단순히 ‘옛날 음식의 맛을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 식품 과학과 건강 산업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인류 식문화의 진화를 이끄는 숨은 주역입니다.